“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처참한 결과 뿐이네. 치즈루, 그 쪽은 어때?”
“여기도 쓸 수 있어 보이는 건 없어요.”
창고 한구석에 놓여있던 문갑 안을 뒤지던 치즈루는 머리가 잔뜩 내려앉은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오키타에게 대답했다. 그 기세에 다시 뽀얗게 피어오르는 먼지 구름으로 치즈루가 재채기를 터트리자 이번에는 오키타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녀의 뾰로통해진 마음을 대변하는 듯 허공에서 새침하게 흔들리는 머리카락의 먼지를 털어주며 오키타는 입을 열었다.
“사람이 사는데 필요한 의식주 중에서 ‘의’를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허탕만 친 것 같아. 하긴, 생각해보면 치즈루가 이 마을을 떠난 게 10년도 더 지난 옛날이라고 했고, 더구나 대대적인 습격까지 받았었으니 옷들이 멀쩡하게 남아있을 리가 만무하겠지.”
그 순간, 옷가지 사이에서 열심히 움직이던 치즈루의 손가락이 멈칫했다. 잠시 불안하게 창고 안 공간을 헤매던 시선을 황급히 다시 문갑으로 돌리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오키타는 아차 싶은 마음이 들었다. 친아버지와 같았던 사람과 유일하게 남겨졌던 혈육을 잃은 상처를 추스르는 데 단 1주일의 시간은 너무나 짧다는 걸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미안해.”
“오키타 상이 사과할 필요는 없으세요. 엄밀하게 말하자면 저와 카오루, 그리고 아버지 사이에 오키타 상이 말려드신 거니까요.”
“그 길을 가기로 결정한 건 나 자신이야. 그리고 그런 말 하지 않기로 했잖아? 이제부터 같이 나아가기로 한 사이면서 치즈루한테 그 말을 들으니 아직 남처럼 생각하는 것 같아서 상처받아.”
그 말을 들은 치즈루는 고개를 들어 조용하게 웃어보였다. 당신에게 저의 모든 것을 맡겼답니다, 잘 아시잖아요. 미소 속에 담긴 치즈루의 그 마음을 읽어낸 오키타는 신도 모르게 탄성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이 아이는 언제부터 이다지도 어른스럽게 웃을 수 있게 되었을까. 오키타는 닳을 대로 닳은 치즈루의 목깃자락을 손끝으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치즈루가 다시 여자답게 옷을 입고 행동하는 당연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돌려주고 싶을 뿐인데 뜻처럼 되지가 않네.”
“무슨 말씀이세요. 그런 오키타 상이야말로 줄곧 양장이시잖아요.”
“난 괜찮아. 익숙해졌으니까. 제일 겉에 입는 외투 비슷한 것만 벗으면 그렇게 불편하지도 않아.”
“그렇다면 저도 마찬가지에요. 오랫동안 입어서 오히려 이 쪽 옷이 더 익숙하고 움직이기도 편해요.”
치즈루는 지금 자신이 한 말이 얼마나 오키타의 마음을 아프게 했는지 알지 못했다. 그녀가 지금 입고 있는 옷은 색이 바래지고 부분부분 헤진 부분이 섬세하게 기워져있는 하카마였다. 그렇다고 해서 고운 새 옷을 사줄 형편도 되지 않는지라 어쩔 수 없이 이렇게 폐허 속에서 비교적 무사히 남아있는 문갑 안을 뒤지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었다. 쓰린 마음을 숨기며 오키타가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아무리 편하다고 해도 안 돼. 치즈루가 괜찮다고 해도 내가 괜찮지 않아. 여차하면 이 옷을 팔 생각도 가지고 있으니까!”
“……그건……잘 어울리시는데…….”
“……지금 그 말을 하면 어떡해.”
“하지만 진심인걸요? 혹시 기분 나쁘셨어요?”
“아니 뭐, 그런 건 아니지만…….”
조금 전의 단호함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오키타는 어색한 헛기침을 했다. 오키타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찬찬히 뜯어보는 치즈루의 얼굴에는 정말로 아쉽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뿐만 아니라 오키타와 눈이 마주치자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배시시 웃기까지 하는 여유를 보이는 것이 아닌가. 이번에는 오키타가 수선스럽게 문갑을 뒤질 차례였다. 그 때, 부산하게 옷가지 속에서 움직이던 오키타의 손에 무언가가 부딪혔다.
“……응?”
“왜 그러세요?”
“손끝에 뭔가가 잡혀서. 뭘까?”
오키타는 손에 잡혔던 물체를 끌어올렸다. 이윽고 두 사람 앞에 나타낸 것은 육중한 나무함이었다. 검게 옻칠한 바탕 위에 섬세하게 조각된 탐스러운 꽃송이들은 그 함이 양갓집 여인의 손길 하에 있었다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말없이 감탄을 하던 두 사람은 시선을 나누었다. 오키타는 뚜껑에 손을 가져가며 다시 한 번 치즈루를 바라보았고, 치즈루는 긴장 어린 얼굴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와아.”
함의 뚜껑을 연 순간 제일 먼저 밝은 빛이 쏟아져 나왔다. 먼지투성이의 창고와는 어울리지 않는 밝은 빛깔에 한참을 눈을 깜빡이고 나서야 오키타는 그 빛을 내는 물체의 정체가 바로 함 속에 들어있던 노란 옷이었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함에서 옷을 꺼내들자 비단 특유의 부드러운 마찰음과 함께 옷 끝자락이 바닥에 펼쳐졌다. 흡사 바닥 위에 모란꽃 한 아름이 쏟아진 듯한 광경에 탄성을 내며 오키타는 치즈루를 돌아보았다.
“이거 봐, 치즈루. 여자 옷이야.”
“네…….”
“치즈루? 무슨 일이야. 얼굴빛이 좋지 않아.”
“아, 아뇨, 대단한 건 아니에요.”
“대단하지 않기는 어디가. 자, 말해봐.”
“정말로 오키타 상이 신경 쓰실 만한 일이…….”
“치즈루가 나를 배려해주려는 마음은 정말 감사하게 생각해. 하지만 그 마음은 나도 가지고 있어. 치즈루에게 고민이나 걱정이 있으면 해결해주고 싶고 들어주고 싶어. 내 말,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흡사 못이라도 박힌 듯 옷자락 끝에 고정된 시선을 움직이지 못하던 치즈루는 오키타의 거듭된 물음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나 곧 오키타가 손을 맞잡아주며 등을 밀어주듯 웃어주자 용기를 얻은 듯 입을 열었다.
“아마도……제 어머니 옷이라고 생각해요. 어렸을 때의 기억이 전부 돌아온 건 아니지만 이 옷에 대한 기억이 있어요.”
“어떤 기억인데?”
“어린 마음에도 이 자수가 마음에 들었었는지 어머니 곁에서 항상 이 모란꽃을 끊임없이 매만지곤 했어요. 그럼 어머니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면서 나중에 치즈루가 어른이 되어 결혼할 때 선물로 줘야겠다고 하시면서 웃으셨어요.”
치즈루의 눈가가 살짝 붉어졌다. 잊고 있었던 어린 날의 추억을 다시 떠올리는 경험이 얼마나 마음 아플지 오키타도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키타는 치즈루가 그 기억과 마주하길 원했다. 지금은 눈물을 흘리더라도 언젠가 추억 이야기를 나누며 웃을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고 믿을 수 있을만큼 오키타가 알고 있는 치즈루는 강한 아이었다.
오키타는 노란 옷을 들어 치즈루를 감쌌다. 그리고 흡사 아기처럼 옷 속에 파묻혀 놀란 토끼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치즈루의 눈가에 입을 맞추었다.
“이렇게 보니까 치즈루한테 노란 색도 잘 어울리네. 우리 사이를 축하해줄 이가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치즈루 어머니가 이렇게 선물을 남겨주셨을 줄이야 알았겠어.”
“오키타 상…….”
“그게 아니지. 여기 이렇게 어머니가 보고 계시는데도 연인이자 남편이 될 나를 계속 성으로 부를거야? 자, 불러봐.”
치즈루가 다시 울음을 터트리면서 오키타의 바람은 이뤄지지 못했다. 하지만 치즈루가 애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이름을 불러주기까지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임을 오키타는 알 수 있었다. 치즈루에게 새로 사줄 옷은 노란색이 좋겠어. 하지만 화려하고 큰 모란보다는 소담스럽고 귀여운 꽃이 더 어울릴 거야. 그래, 예를 들어 패랭이꽃. 오키타는 치즈루를 품에 안았다.
수정하고 싶지만 방법을 모른다...으으....